5. 앵글로색슨 문학
From the first to the fifth century,
England was a province of the Roman Empire and was named Britannia after its Celtic-speaking inhabitants, the Britons. The Britons adapted themselves to Roman civilization, of which the ruins survived to impress the poet of The Wanderer, who refers to them as “the old works of giants.” The withdrawal of the Roman legions during the fifth century, in a vain attempt to protect Rome itself from the threat of Germanic conquest, left the island vulnerable to seafaring Germanic invaders.
1세기에서 5세기까지 영국은 로마 제국의 영토였으며, 켈트어를 사용한 브리튼족의 이름을 따 브리타니아로 명명되었다. 브리튼족은 로마 문명을 받아들였는데, 그 잔재가 『방랑자 The Wanderer』의 시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그들을 “거인들의 오래된 작품”으로 칭할 정도였다. 5세기 게르만 정복의 위협으로부터 로마를 지키려던 헛된 시도 끝에 로마 군단이 섬에서 철수를 하자, 영국은 바다를 항해하는 게르만족 침입자의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These belonged primarily to three related tribes,
the Angles, the Saxons, and the Jutes. The name English derives from the Angles, and the names of the countries Essex, Sussex, and Wessex refer to the territories occupied by the East, South, and West Saxons.
이들은 주로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 등 서로 가까운 세 개의 부족민이었다. ‘잉글리시(English)’라는 이름은 앵글족에서 비롯되었고, 에섹스, 서섹스, 웨섹스는 동, 남, 서쪽의 색슨족이 점령한 영토를 의미한다.
The Anglo-Saxon occupation
was no sudden conquest but extended over decades of fighting against the native Britons. The latter were, finally, largely confined to the mountainous region of Wales, where the modern form of their language is spoken alongside English to this day.
앵글로색슨의 점령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토착 브리튼족과 수십 년에 걸친 싸움 끝에 달성된 결과이다. 결국 브리튼족은 웨일즈의 산악지역으로 밀려났고, 이 때부터 지금까지 현대적 형태의 웨일즈어가 영어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The Britons had become Christians in the fourth century
after the conversion of Emperor Constantine along with most of the rest of the Roman Empire, but for about 150 years after the beginning of the invasion, Christianity was maintained only in the remoter regions where the as yet pagan Anglo-Saxons failed to penetrate.
브리튼족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 이후, 4세기에 나머지 로마 제국의 개종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하지만 침략 후 150년 동안 기독교는 아직 이교도였던 앵글로색슨족이 침투하지 못한 변방에서만 유지되었다.
In the year 597, however, a Benedictine monk
(afterward St. Augustine of Canterbury) was sent by Pope Gregory as a missionary to King Ethelbert of Kent, the most southerly of the kingdoms into which England was then divided, and about the same time missionaries from Ireland began to preach Christianity in the north.
597년, 베네딕트회의 한 수도사(이후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레고리 교황에 의해, 당시 잉글랜드가 분할된 왕국 중 가장 남단에 위치한 켄트의 에델버트왕에게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거의 같은 시기에 북부에서는 아일랜드의 선교사가 기독교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Within 75 years the island was once more predominantly Christian.
Before Christianity, there had been no books. The impact of Christianity on literac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first extended written specimen of the Old English (Anglo-Saxon) language is a code of laws promulgated by Ethelbert, the first English Christian King.
그 결과 75년만에, 전체 섬은 다시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는 책이 없었다. 그리스도교가 문해력에 미친 영향은 고대 영어(앵글로색슨어)로 된 최초의 문헌이 최초의 기독교 왕인 에델버트가 공포한 법전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In the centuries that followed the conversion,
England produced many distinguished churchmen. One of the earliest of these was Bede, whose Latin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which tells the story of the conversion and of the English church, was completed in 731; this remains one of our most important sources of knowledge about the period.
개종 후 수 세기 동안 영국은 수많은 저명한 교인들을 배출했다. 초기의 대표적인 교인이 비드인데 그는 731년, 영국민의 개종과 영국 교회에 관해 쓴 『영국민의 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를 완성했다. 이 책은 당시 시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지식의 원천이다.
In the next generation Alcuin (735-804),
a man of wide culture, became the friend and adviser of the Frankish emperor Charlemagne, whom he assisted in making the Frankish court a great center of learning; thus by the year 800 English culture had developed so richly that it overflowed its insular boundaries.
다음 세대에는, 폭넓은 교양의 알쿠인(735-804)이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황제의 친구이자 고문으로서 프랑크 왕실을 학문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따라서 800년경 영국 문화는 그 고립된 경계를 넘을 정도로 풍성한 발전을 이루었다.
In the ninth century,
the Christian Anglo-Saxons were themselves subjected to new Germanic invasions by the Danes who in their longboats repeatedly ravaged the coast, sacking Bede’s monastery among others. Such a raid late in the tenth century inspired The Battle of Maldon, the last of the Old English heroic poems.
9세기가 되자, 기독교의 앵글로색슨족은 장거리 배를 타고 끊임없이 영국 해안을 들락거리면서 비드의 수도원을 약탈했던 새로운 게르만족인 데인족에 굴복했다. 이 침략은, 10세기 후반 고대 영어로 된 마지막 영웅시인 『몰던전투, The Battle of Maldon』에 영감을 주었다.
The Danes also occupied the northern part of the island,
threatening to overrun the rest. They were stopped by Alfred, king of the West Saxons from 871 to 899, who for a time united all the kingdoms of southern England.
데인족은 섬의 북쪽지방을 점령하면서 나머지 지역도 정복하려 위협했다. 하지만, 871-899년 웨섹스의 왕 알프레드가 영국 남부를 통일하며 이들의 위협은 저지했다.
This most active king was also an enthusiastic patron of literature.
He himself translated various works from Latin, the most important of which was Boethius’s Consolation of Philosophy, a sixth-century Roman work also translated in the fourteenth century by Chaucer. Alfred probably also instigated a translation of Bede’s History and the beginning of the Anglo-Saxon Chronicle: this year-by-year record in Old English of important events in England was maintained at one monastery until the middle of the twelfth century. Practically all of Old English poetry is preserved in copies made in the West Saxon dialect after the reign of Alfred.
열렬한 문학 후원자였던 알프레드 왕은 라틴어로 된 다양한 작품을 몸소 번역하기도 했는데, 이중 대표적 작품이 6세기 로마의 보에티우스가 쓴 『철학의 위로, Consolation of Philosophy』였는데, 이 작품은 14세기에 초서가 번역하기도 하였다. 알프레드는 또한 비드의 『역사 (History)』 번역과 『앵글로색슨 연대기, Anglo-Saxon Chronicle』의 초반부 번역을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연대별로 주요 사건들을 고대 영어로 정리한 이 책은 20세기 중반까지 한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었다. 알프레드 통치 이후 실제로 모든 고대 영시들은 웨섹스 방언으로 된 사본으로 보존되어 있다.
4. 노튼 영문학 – 중세 수도원의 역할 : 출판 (enko.co.kr)
중세 영문학 – 앵글로색슨의 시 1 (enko.co.kr)
관련 영국 드라마: 라스트 킹덤
BBC Two – The Last Kingdom, Series 1